

“나는 이야기의 형태가 선형성을 벗어날 때 흥미를 느낀다. 역사를 넘어선 서사 밖의 허구에 관한 것이다. 시뮬레이션은 혼돈을 지날 수 있게 해주는 여러 가능성의 투영이다." _피에르 위그
용산구 이태원에 위치한 리움미술관에서 피에르 위그(Pierre Huyghe)의 개인전 <리미널(Liminal)>이 열리고 있습니다. 이 전시는 피노 컬렉션의 푼타 델라 도가나와 공동 제작한 작품을 포함해 피에르 위그의 최근 10여 년간의 예술적 탐구를 조명하는 아시아 최초 개인전으로 2025년 2. 26~7. 6까지 열립니다. 전시는 신작 <리미널>, <카마타>, <이디엄>과 대표작 <휴먼 마스크>, <오프스프링>, 수족관 시리즈 그리고 인간과 기계의 협업으로 생성되는 <U움벨트-안리>, <암세포 변환기> 등 총 12점의 작품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전시 <리미널> 외에도 <현대미술 소장품 전>이 M2에서, M1에서는 상설전으로 고미술 소장품 전이 열리고 있으니 함께 보시길 바랍니다.

피에르 위그 전시 타이틀인 ‘리미널(liminal)’은 라틴어 limen에서 유래한 단어로 "문턱(threshold)"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어요. ‘무언가가 두 가지의 상태, 두 장소, 혹은 정체성 사이의 경계, 생각지도 못한 무언가가 출현할 수 있는 과도기적 상태’에 있을 때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또한 ‘리미널 상태’는 이렇게 기존에 있던 정체성이 해체되고 새로운 정체성이 생성되는 과도기 속에서 느끼는 혼란스러운 감정입니다. 이상하고 현실감이 떨어지는, 어딘가 모르게 불편한 느낌이 드는 공간, 마치 꿈에서 본 것 같은 익숙하면서도 낯선 분위기, 꿈과 현실 사이의 상태. 우리가 어떤 변화나 큰 전환을 겪을 때 느끼는 심리적 불안이나 혼란도 리미널 상태입니다. 이런 리미널은 불가능하고 모호한 것을 경험하게 함으로써 기존의 인간관과는 다른 현실을 상상하도록 합니다. 이러한 상상은 동시에 새로운 것을 출현시키고, 창조의 가능성이 열리는 순간이 되기도 합니다.
피에르 위그는 1967년 생으로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나 칠레 산티아고에 거주하며 활동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리미널>(2024), 푼타델라도가나, 피노컬렉션, 베니스, <키메라>(2023), EMMA, 에스포, <변종률>(2022), 키스테포스미술관, 예브나케르, <애프터 울벨트>(2021) 등 많은 곳에서 전시를 했습니다. 또한 2012-2014년에 파리 퐁피두 센터, 쾰른 루드비히 미술관,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미술관에서 주요 회고전을 열었습니다. 2019년에는 오카야마 아트 서밋 <이프 더 스네이크>의 예술감독으로 활동한 바 있고요. 위그의 작품은 파리 퐁피두센터,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미술관, 바젤 쿤스트 뮤지엄,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뉴욕 현대 미술관, 파리 현대 미술관, 오타와 캐나다 국립 미술관, 베를린 국립 박물관,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 샌프란시스코 현대미술관, 런던 테이트 모던 등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피에르 위그는 전시 공간을 단순히 작품 전시를 위한 장소가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생태계로, 인간과 비인간의 상호관계를 통해 생성과 진화가 일어나는 살아있는 공간으로 만들고자 했습니다. 실시간 데이터를 활용한 프로그램과 생명공학을 결합한 그의 작품들과 공간은 전시장을 벗어나서도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작품과 관객은 서로 쌍방으로 개입하고 진화하며 환경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죠.
블랙박스 전시장에서 예상치 못한 곳에 작품이 놓여 있어 조금 당황하실 수도 있는데요. 어둠 속에서 불쑥 보이는 기이한 무언가는 공포스럽기도 하지만 호기심을 건드리기도 합니다. 저것은 무엇일까? 왜 저게 저 장소에 있을까? 움직이는 걸까? 사람인가? 조각인가? 작가는 무엇을 의도한 것일까? 이런 익숙하지 않은, 조금은 불편한 감정과 호기심은 평소에 느껴본 적 없는 감각과 사고를 자극합니다. 자극에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든 반응하게 되고 이런 경험으로 인해 우리의 정체성은 시시때때로 변화합니다.
이제 작품을 볼까요?
<블랙박스 전시실>

<에스텔라리움(Estelarium)>, 2024. 현무암
이 작품은 출산 직전 임산부의 배를 3D 스캔하여, 그 형태를 현무암으로 제작한 작품입니다.
작품의 제목 Estellarum은 ‘별들로부터’ 혹은 ‘별들의 것’이라는 의미의 라틴어입니다. 제목이 매우 시적이죠? 임산부의 신체, 생명을 잉태한 여성의 배를 단순히 생물학적 신체가 아닌 거대한 우주와 별자리로 바라본 것이죠. 피에르 위그는 생명이 태어나는 순간의 고귀한 시간과 숭고함을 간직하고 싶었을까요?
그런데 피에르 위그는 수많은 암석 중에 왜 현무암을 재료로 선택했을까요? 현무암은 마그마가 공기와 접촉할 때 형성됩니다. 임산부의 신체에서 생명이 태어나는 순간과 마그마가 공기와 접촉해서 현무암이 만들어지는 순간이 ‘생명의 탄생’과 ‘생성 직전의 숭고함’으로 이 둘의 ‘접촉과 흔적’은 어딘가 닿아있는 듯해요.
<에스텔라리움>은 임산부의 신체와 우주가 교차하는 이 전시의 첫 번째 리미널 작품입니다.



<주드람 4>, 2011. 수족관, 화살게, 소라게, 콘스탄틴 브랑쿠시의 <잠든 뮤즈>(1910)를 바탕으로 수지로 제작한 소라껍데기
<주드람 4>는 수족관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는 불확실한 세계를 나타낸 것으로 이 작품은 인간과 비인간이 상호 관계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수족관에 놓여 있는 조각은 콘스탄틴 브랑쿠시(Constantin Brancusi)의 조각 <잠든 뮤즈(Sleeping Muse)>(1910)의 복제품입니다. 수족관을 들여다 보면 조각 작품 안에 꿈들 거리는 소라게가 있는 것을 볼 수 있어요. 소라게는 이곳에서 살고 있답니다. 사람의 얼굴을 형상화한 조각품은 소라게가 움직이는 대로 끌려다닙니다. 저 조각품은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는 인간이 아닌 사물이지만,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를 보여주고자 설치해 놓은 인간을 상징하는 사물일 것입니다. 물론 소라게는 비인간의 상징일 것이고요. 인간이 항상 능동적인 존재라고만 볼 수는 없어요. 인간의 입장에서 타자화한 비인간들은 의도와 무관하게 권력을 행합니다. 이는 근본적으로 우리의 시선, 지각, 감각을 변화시키고 인간의 판단과 앎에 직접적인 영향을 줍니다. 철학자 제인 베넷은 이를 ‘생기적 유물론’이라고 했어요.
소라게와 뮤즈의 얼굴은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와 그 둘의 상호작용을 보여주고자 한 설치 작품입니다. 이러한 인간과 비인간의 상호작용을 통해 수족관 안의 환경은 진화합니다. 그것을 바라보는 관객은 변화하고요. 그 관객은 또 다른 인간 혹은 비인간과 다시 관계하게 되고 세계는 그런 방식으로 계속 진화합니다.



<리미널(Liminal)>, 2024-진행중. 실시간 시뮬레이션, 사운드, 센서
기이함과 으스스함. 블랙박스 전시장 입구에 바로 들어서면 검고 어두운 평면의 공간을 돌아다니는, 얼굴도 뇌도 없는 인간의 형상이 담긴 <리미널>이 시선을 압도합니다. 전시 타이틀과 동명의 작품인 <리미널>은 전시 공간의 센서가 포착한 주변 환경과 인공 신경 조직 데이터를 바탕으로 결정됩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 형상은 주변의 데이터를 학습하고 기억을 쌓아갑니다. 전시장에는 황금색 마스크를 쓴 사람의 언어 <이디엄>이 인간의 발성과 신경망을 통해 실시간으로 생성됩니다. <리미널>은 ‘생각지도 못한 무언가가 출현할 수 있는 과도기적 상태’를 의미하죠. 피에르 위그는 이 전시에서 전반적으로 작품마다 인간과 비인간적 존재를 등장시켜 경계를 흐리고 교차시키며 ‘리미널’에 대해 말하고 있어요. 영상 속에 얼굴도 뇌도 없는 이 기이하고 으스스한 인간의 형상은 ‘공간’이기도 하고 ‘빈 공간’이기도 합니다. ‘공간’이기도 하고 ‘빈 공간’이기도 하다니 이게 무슨 말일까요? 앞에서 언급했지만 리미널 상태는 경계적 상태입니다. ‘무언가가 두 가지의 상태, 두 개의 장소, 혹은 정체성 사이의 경계, 생각지도 못한 무언가가 출현할 수 있는 과도기적 상태‘. 이 상태는 고정된 정체성에서 벗어나 있는 해체와 생성 사이에 있는 상태죠. ’공간‘이기도 하고 ’빈 공간‘이기도 한 저 기이하고 으스스한 얼굴없는 인간은 경계적 존재이면서 리미널한 통로이고 전달자입니다.
이 얼굴 없는 형상은 외부의 자극을 통해 실시간으로 정보를 받고 이를 통해 미묘한 몸짓을 만들어냅니다. 그 몸짓은 곧 ‘언어’가 됩니다. 이 언어는 비인간 존재에게 읽히고, 이는 다시 인간의 행동을 유발하고 반응하도록 합니다. 이러한 것들은 전시 공간을 벗어나서도 이어지고 비인간 존재와 인간은 계속 상호작용하며 인간의 영역을 초월하여 환경이 구성됩니다.
피에르 위그는 이렇게 리미널한 존재나 공간을 창조하여 관객이 그 안에서 감각하고 상상하며 의미를 탐색해 나가도록 유도합니다. 그의 작품 속에 있는 존재들은 모두 고정된 정체성에서 벗어나 ‘경계적 상태’에 있어요. 이런 모호한 상태는 조금 불편하고 혼란스러운 감정과 감각을 동반하는데요. 반면 이 불편함은 새롭고 창조적인 것이 생성되기 직전의 상태이기도 합니다. <이디엄>과 <리미널>은 둘 다 공간과 기술, 인공 지능의 상호작용으로 생물 같은 환경을 구성합니다. 관객인 우리는 그 안에서 ‘능동성’과 ‘수동성’을 동반한 ‘보는 자’, ‘보는 자’는 반응하고 환경을 구성하는 요소로 존재합니다.





<휴먼 마스크(Human Mask)>, 2014. 영상, 컬러, 사운드, 19분
<휴먼 마스크>는 후쿠시마 주변 핵 배제 구역을 배경으로 한 영상입니다. 실제로 버려진 레스토랑에서 훈련된 원숭이에게 인간의 가면을 씌우고 촬영한 것이라고 합니다. 웨이트리스의 복장을 착용한 원숭이는 영상 속에서 기계적으로 돌아다니다가 멈추기를 반복합니다. 때로 원숭이는 멈추어 멍하니 앉아 어딘가를 공허하게 응시합니다. 인간의 가면을 쓴 원숭이가 돌아다니며 우리에게 보여주는 레스토랑의 구석구석 풍경과 반복적인 동작을 보고 있노라면 고립감과 단절감, 섬뜩하고 공허한 불안감과 공포를 느끼게 됩니다.
이것은 동물인가 인간인가, 가면인가 얼굴인가, 저것은 연출된 것인가 아닌가, 끊임없이 피에르 위그는 실재와 허구, 인간과 비인간 사이의 경계에서 ‘정체성’과 ‘주체성’에 대해 질문하는군뇨. 재앙이 일어난 직후의 후쿠시마라는 장소. 버려진 장소인 레스토랑에서 인간의 가면을 쓴 인간 아닌 존재. 훈련된 원숭이의 공허한 시선과 불가능한 응시. 비인간이 착용하고 있는 ‘인간이라는 가면‘. 도대체 인간이란 무엇일까요?
"로지 브라이도티의 표현을 빌리면 포스트휴먼은 ‘인류세Antropocene’로 알려진 유전 공학 시대, 즉 인간이 지구상의 모든 생명에 영향을 미칠 능력을 지닌 지질학적 세력이 된 역사적 순간에, 인간을 지시하는 기본 준거 단위를 다시 생각하도록 돕는 생성적 도구다. 확장하자면, 포스트휴먼 이론은 또한 인간 행위자들과 인간-아닌 행위자 둘 다와 우리가 맺는 상호 작용의 기본 신조를 지구 행성적 규모로 다시 생각하는 데 도움을 준다."
- 키워드로 읽는 SF.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1968)와 <블레이드 러너>(1982: 1993). 복도훈 SF 비평집. 도서출판b.

<이디엄(Idiom)>, 2024-진행중. 인공지능에 의해 실시간으로 생성되는 목소리, 금색 LED 마스크
블랙박스 공간에서는 황금 마스크를 착용한 사람이 앉아 있기도 하고 서 있기도 하고 돌아다니기도 합니다. 어둠 속에서 잘 보이지 않아 조금 놀랄 수도 있고 섬뜩한 느낌을 받을 수도 있어요. 이 황금 마스크에는 바이오 센서가 달려 있다고 해요. 주변 환경에 반응하는 이 센서는 관객의 움직임과도 연동되어 있습니다. <이디엄>은 인공지능이 언어 데이터와 신경망 기반 알고리즘을 통해 새로운 형식의 ‘언어적 이미지’를 실시간으로 생성하는 작품입니다. 이 작업은 인간의 언어와 비인간의 세계, 인공 지능과 생명체 사이의 커뮤니케이션 가능성을 탐색합니다. 인간이 지각할 수 없는 부분을 포함한 특정 정보가 인간의 발성기관을 통해 특정한 구문과 음소로 변환되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마스크를 착용한 실체를 알 수 없는 존재가 마스크를 통해 말하면서 ‘공동체’가 형성됩니다. 이때 이 언어는 흔히 쓰이는 말로 표현되는 언어와는 다소 다른 언어인데요. 이런 낯선 언어는 말로 표현하기 어렵고, 말로 표현되지 않는 언어예요. 언어가 달라지면 우리는 마치 다른 나라에 있는 것처럼 그 그룹에 참여하기 어려워집니다. 해독이 어려운 낯선 언어는 다른 방식의 커뮤니케이션과 언어를 요구합니다. 또한 말로 표현되지 않는 낯선 것들을 마주하게 되면 우리는 기존의 방식과는 다른 방식으로 그것들을 해석하려고 애를 쓰게 됩니다. 피에르 위그가 우리에게 전하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경계에서의 감각’. ‘언어’란 무엇일까요? 우리는 인간이 아닌 존재의 언어를 이해할 수 있을까요? 우리 인간의 감각은 얼마나 한정적인 것인가요?
여기서 말하는 '이디엄(idiom)'은 단순한 관용구 이상의 의미를 지니며, 인간이 사고를 구성하고 세계를 이해하는 언어적 형식 그 자체를 탐구하는 단어입니다.
“언어는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에 깊이 얽혀 있지만, 저는 그것이 없는 곳에서 무엇이 감각될 수 있는지를 실험하고 싶었습니다." - 피에르 위그
<그라운드 갤러리>



<캄브리아기 대폭발 16>, 2018. 수조, 투구게, 화살게, 아네모네, 모래, 바위
‘캄브리아기 대폭발‘은 캄브리아기(약 5억 4천만 년 전)에 일어난 진화적 사건으로 다양한 종류의 동물 화석이 짧은 기간 안에 갑자기 출현한 것을 말합니다. 이 기간 동안 절지동물, 연체동물, 극피동물 등 대부분의 생물 문(phylum)이 등장했어요. 그 이전에 존재하던 생물들은 단세포 생물 위주의 단순한 형태였는데 캄브리아기 대폭발 이후 이 시기부터 다세포 동물이 다양해지고 감각기관이나 입, 항문, 외골격, 신경계 등이 처음 출현했답니다. 그야말로 이 시기는 가장 급진적으로 생명이 출현한 실험기, 대혼란기, 창조의 시기인 거죠. 그런 의미에서 <캄브리아기 대폭발 16>은 피에르 위그의 이번 전시 주제인 <리미널>과 매우 닮아있어요. 이 작품은 물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사실 바위가 잠겨 있는 공간은 물이 아닙니다. 작가는 바위를 일부러 중력에 문제가 있는 것처럼 보이도록 제작했어요. 표현 방식도 리미널스럽지요? 검은 모래 위에는 캄브리아기 대폭발 당시에 출현한 고대 종이 살고 있습니다. 이 종은 원시 상태 이후 형태가 변하지 않은 살아있는 화석이나 다름없습니다. 이들의 본능적인 행동은 개체의 수명이 다할 때까지 지속되며 번식을 이어가면서 반복됩니다.
상상해 보세요!
“캄브리아기에는 생명의 엄청난 실험이 있었다. 지금 우리 시대도 그렇다. 기존 분류와 정체성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 피에르 위그




<주기적 딜레마(엘디아 델 로호)(Circadian Dilemma (El Dia del Ojo))>, 2017.
수족관, 장님 동굴 테트라(Astyanaxmexicanus, 눈이 있는 것과 없는 것),
조류, 동굴을 스캔하여 떠낸 시멘트 주물, 검은 변색 유리, 위치 기반 프로그램
이 수족관 내부의 풍경은 멕시코 수중 동굴을 리모델링한 것입니다. 여기에는 다양한 종의 테트라 물고기가 살고 있어요. 이 테트라는 수백만 년 전 어두운 동굴에 들어오면서 시각이 퇴화되어 앞을 보지 못해요. 그래서 장님 동굴 물고기(blind cave fish)라고도 불립니다. 작품 제목인 <주기적 딜레마(엘디아 델 로호)(Circadian Dilemma (El Dia del Ojo))>는 동물, 식물, 곰팡이, 박테리아에서 관찰되는 하루 주기 리듬(circadian rhythm)을 의미합니다. 수족관 안에는 장님 테트라와 시력을 가진 테트라가 공존하고 있는데요. 환경의 변화로 시력이 퇴화된 장님 동굴 물고기의 하루 주기 리듬은 지구의 자전인 24시간 보다 빠르다고 합니다. 이 수족관 안에 있는 두 물고기의 하루 주기 리듬은 서로 다른거죠. 수족관 안에는 두 가지의 하루 주기 리듬이 동시에 존재하는 거예요. 수조의 검은색 변색 유리는 빛의 양, 날씨 관련 데이터를 받는 알고리즘 등에 의해 색이 변합니다. 또는 유리 안에 있는 액정으로 인해 유리가 투명해질 수도, 불투명해질 수도, 심지어는 검은색이 될 수도 있답니다.
<주기적 딜레마>는 인간 중심의 시간 인식과 비인간의 감각 세계를 탐구하는 작품입니다.




<카마타(Camata)>, 2024 진행 중
기계 학습으로 구동되는 로보틱스, 자기생성 영상, 실시간 인공지능 편집, 사운드, 센서
사막 한가운데 해골이 놓여 있고 기계가 해골을 탐사합니다. 그런데 이 기계, 마치 인간 같지 않나요? 저 장소는 아타카마 사막이에요. 시멘트를 부어 놓은 것 같은 산이 보입니다. 먼 산을 배경으로 황량한 사막에 놓여 있는 이 해골은 누구인지, 언제 어떤 이유로 죽었는지 그저 골격만 남아있습니다. 뼈대만 남은 해골을 들여다보며 로봇은 무엇을 하고 있는 걸까요?
인간은 생명을 잃었고, 생명이 없는 인간의 유해를 탐사하고 있는 로봇은 인간과 닮아있습니다. 그런데 뼈대만 남은 해골의 형상과 로봇의 형상이 왠지 오버랩 되는군요. 아타카마 사막은 칠레 북부에 위치한 세계에서 가장 건조한 사막 중 하나로 독특한 자연환경과 극한 기후조건을 가진, 천문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입니다. 연평균 강수량이 1mm 이하인 지역도 있고, 어떤 지역은 수백 년간 비가 내리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곳도 있다고 합니다. 당연히 이곳에서는 동식물이 살아갈 수 없겠죠. 정말 극한 생물들만이 존재할 거예요. <카마타>는 일반적인 비디오 촬영 영상 작품이 아니라 AI가 실시간으로 장면을 선택하고 편집하는 자율적 시스템입니다. 금색 구 안의 센서는 지속적으로 출력되는 이미지를 수정합니다. 작품이 이미 완성되어 고정된 형태가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영상인 거죠. 따라서 <카마타>는 실시간으로 관객마다 다른 것을 보게 됩니다.
영상 속 풍경은 실제로 존재하는 장소죠. 생명체가 살지 않는 화성과 환경이 비슷한 장소이기도 하고요. 그런데 화성은 아니잖아요? 미래를 그린 공상 영화에서 본 듯한 이 장소는 왠지 익숙해요. 피에르 위그가 선택한 아타카마 지역은 고도 2400mm 이상의 오염 없는 맑은 하늘을 볼 수 있는 곳으로 천문학의 중심지입니다. 또한 광물 자원이 풍부하고 고대 안데스 문명의 유적과 미라들이 발견되는 다양한 과학 실험지이며 문학, 예술, 철학의 소재가 되기도 하는 희소한 가치를 지닌 지역입니다.
이렇게 <카마타>는 아타카마 지역을 배경으로 기술과 생명, 현실과 허구의 경계, 존재의 리미널 한 상태를 표현한 작품입니다. 이 비디오 영상은 이탈리아 베니스의 푼타 델라 도가나(Punta della Dogana)에서 최초로 공개되었고, 아시아 전시로는 처음으로 현재 서울 리움미술관 <리미널> 전시에서 공개하고 있습니다.
이외에도 <오프스프링(Offspring)>, <U움벨트-안리(UUmwelt-Annlee)>, <암세포 변환기(Cancer Variator)>, <마음의 눈(S)(Mind’s Eye(S))>이 전시되고 있습니다.
"‘인간보다 더 인간적’이라고 말할 때 이 ‘더’는 여전히 인간의, 인간을 위한, 인간에 의한 양적 · 질적 척도에 머무는 말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 ‘더’는 오히려 인간의 저 척도를 부수고 와해시키는 과잉, 비(반)인간적인, 더는 인간에게 의존하지 않는, 인간의 몸속을 뚫고 나오는 에일리언처럼 ‘섬뜩한unheimlich’ 어떤 것이다. "
- 키워드로 읽는 SF.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1968)와 <블레이드 러너>(1982; 1993). 복도훈 SF 비평집. 도서출판b.

피에르 위그 <리미널> 전시는 도슨트 프로그램이 없습니다. 전시장 입구에 리플렛이 비치되어 있습니다.
* 리플렛은 재활용되므로 반납해주셔야 합니다.


바로 근처에 함께 즐기기 좋은 갤러리들이 모여 있습니다.

• 페이스 갤러리 (서울 용산구 이태원로 267)
- 홈페이지 : https://www.pacegallery.com/
• 갤러리 조은 (서울 용산구 이태원로55가길 3 골든너겟 빌딩 1층)
- 홈페이지 : https://galleryjoeun.com

• 아마도 예술공간 (서울 용산구 이태원로54길 8)
- 홈페이지 : http://www.amadoart.org/

[주소]
서울 용산구 이태원로55길 60-16
리움미술관 블랙박스, 그라운드갤러리(M3)
[관람시간]
10:00 ~ 18:00 (입장 마감 17:30)
• 휴관일: 매주 월요일
[입장료]
단독 전시 16,000원 / 통합 관람권 20,000원
에디터 탁선

용산구 이태원에 위치한 리움미술관에서 피에르 위그(Pierre Huyghe)의 개인전 <리미널(Liminal)>이 열리고 있습니다. 이 전시는 피노 컬렉션의 푼타 델라 도가나와 공동 제작한 작품을 포함해 피에르 위그의 최근 10여 년간의 예술적 탐구를 조명하는 아시아 최초 개인전으로 2025년 2. 26~7. 6까지 열립니다. 전시는 신작 <리미널>, <카마타>, <이디엄>과 대표작 <휴먼 마스크>, <오프스프링>, 수족관 시리즈 그리고 인간과 기계의 협업으로 생성되는 <U움벨트-안리>, <암세포 변환기> 등 총 12점의 작품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전시 <리미널> 외에도 <현대미술 소장품 전>이 M2에서, M1에서는 상설전으로 고미술 소장품 전이 열리고 있으니 함께 보시길 바랍니다.
피에르 위그 전시 타이틀인 ‘리미널(liminal)’은 라틴어 limen에서 유래한 단어로 "문턱(threshold)"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어요. ‘무언가가 두 가지의 상태, 두 장소, 혹은 정체성 사이의 경계, 생각지도 못한 무언가가 출현할 수 있는 과도기적 상태’에 있을 때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또한 ‘리미널 상태’는 이렇게 기존에 있던 정체성이 해체되고 새로운 정체성이 생성되는 과도기 속에서 느끼는 혼란스러운 감정입니다. 이상하고 현실감이 떨어지는, 어딘가 모르게 불편한 느낌이 드는 공간, 마치 꿈에서 본 것 같은 익숙하면서도 낯선 분위기, 꿈과 현실 사이의 상태. 우리가 어떤 변화나 큰 전환을 겪을 때 느끼는 심리적 불안이나 혼란도 리미널 상태입니다. 이런 리미널은 불가능하고 모호한 것을 경험하게 함으로써 기존의 인간관과는 다른 현실을 상상하도록 합니다. 이러한 상상은 동시에 새로운 것을 출현시키고, 창조의 가능성이 열리는 순간이 되기도 합니다.
피에르 위그는 1967년 생으로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나 칠레 산티아고에 거주하며 활동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리미널>(2024), 푼타델라도가나, 피노컬렉션, 베니스, <키메라>(2023), EMMA, 에스포, <변종률>(2022), 키스테포스미술관, 예브나케르, <애프터 울벨트>(2021) 등 많은 곳에서 전시를 했습니다. 또한 2012-2014년에 파리 퐁피두 센터, 쾰른 루드비히 미술관,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미술관에서 주요 회고전을 열었습니다. 2019년에는 오카야마 아트 서밋 <이프 더 스네이크>의 예술감독으로 활동한 바 있고요. 위그의 작품은 파리 퐁피두센터,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미술관, 바젤 쿤스트 뮤지엄,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뉴욕 현대 미술관, 파리 현대 미술관, 오타와 캐나다 국립 미술관, 베를린 국립 박물관,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 샌프란시스코 현대미술관, 런던 테이트 모던 등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피에르 위그는 전시 공간을 단순히 작품 전시를 위한 장소가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생태계로, 인간과 비인간의 상호관계를 통해 생성과 진화가 일어나는 살아있는 공간으로 만들고자 했습니다. 실시간 데이터를 활용한 프로그램과 생명공학을 결합한 그의 작품들과 공간은 전시장을 벗어나서도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작품과 관객은 서로 쌍방으로 개입하고 진화하며 환경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죠.
블랙박스 전시장에서 예상치 못한 곳에 작품이 놓여 있어 조금 당황하실 수도 있는데요. 어둠 속에서 불쑥 보이는 기이한 무언가는 공포스럽기도 하지만 호기심을 건드리기도 합니다. 저것은 무엇일까? 왜 저게 저 장소에 있을까? 움직이는 걸까? 사람인가? 조각인가? 작가는 무엇을 의도한 것일까? 이런 익숙하지 않은, 조금은 불편한 감정과 호기심은 평소에 느껴본 적 없는 감각과 사고를 자극합니다. 자극에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든 반응하게 되고 이런 경험으로 인해 우리의 정체성은 시시때때로 변화합니다.
이제 작품을 볼까요?
<블랙박스 전시실>
<에스텔라리움(Estelarium)>, 2024. 현무암
이 작품은 출산 직전 임산부의 배를 3D 스캔하여, 그 형태를 현무암으로 제작한 작품입니다.
작품의 제목 Estellarum은 ‘별들로부터’ 혹은 ‘별들의 것’이라는 의미의 라틴어입니다. 제목이 매우 시적이죠? 임산부의 신체, 생명을 잉태한 여성의 배를 단순히 생물학적 신체가 아닌 거대한 우주와 별자리로 바라본 것이죠. 피에르 위그는 생명이 태어나는 순간의 고귀한 시간과 숭고함을 간직하고 싶었을까요?
그런데 피에르 위그는 수많은 암석 중에 왜 현무암을 재료로 선택했을까요? 현무암은 마그마가 공기와 접촉할 때 형성됩니다. 임산부의 신체에서 생명이 태어나는 순간과 마그마가 공기와 접촉해서 현무암이 만들어지는 순간이 ‘생명의 탄생’과 ‘생성 직전의 숭고함’으로 이 둘의 ‘접촉과 흔적’은 어딘가 닿아있는 듯해요.
<에스텔라리움>은 임산부의 신체와 우주가 교차하는 이 전시의 첫 번째 리미널 작품입니다.
<주드람 4>, 2011. 수족관, 화살게, 소라게, 콘스탄틴 브랑쿠시의 <잠든 뮤즈>(1910)를 바탕으로 수지로 제작한 소라껍데기
<주드람 4>는 수족관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는 불확실한 세계를 나타낸 것으로 이 작품은 인간과 비인간이 상호 관계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수족관에 놓여 있는 조각은 콘스탄틴 브랑쿠시(Constantin Brancusi)의 조각 <잠든 뮤즈(Sleeping Muse)>(1910)의 복제품입니다. 수족관을 들여다 보면 조각 작품 안에 꿈들 거리는 소라게가 있는 것을 볼 수 있어요. 소라게는 이곳에서 살고 있답니다. 사람의 얼굴을 형상화한 조각품은 소라게가 움직이는 대로 끌려다닙니다. 저 조각품은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는 인간이 아닌 사물이지만,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를 보여주고자 설치해 놓은 인간을 상징하는 사물일 것입니다. 물론 소라게는 비인간의 상징일 것이고요. 인간이 항상 능동적인 존재라고만 볼 수는 없어요. 인간의 입장에서 타자화한 비인간들은 의도와 무관하게 권력을 행합니다. 이는 근본적으로 우리의 시선, 지각, 감각을 변화시키고 인간의 판단과 앎에 직접적인 영향을 줍니다. 철학자 제인 베넷은 이를 ‘생기적 유물론’이라고 했어요.
소라게와 뮤즈의 얼굴은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와 그 둘의 상호작용을 보여주고자 한 설치 작품입니다. 이러한 인간과 비인간의 상호작용을 통해 수족관 안의 환경은 진화합니다. 그것을 바라보는 관객은 변화하고요. 그 관객은 또 다른 인간 혹은 비인간과 다시 관계하게 되고 세계는 그런 방식으로 계속 진화합니다.
<리미널(Liminal)>, 2024-진행중. 실시간 시뮬레이션, 사운드, 센서
기이함과 으스스함. 블랙박스 전시장 입구에 바로 들어서면 검고 어두운 평면의 공간을 돌아다니는, 얼굴도 뇌도 없는 인간의 형상이 담긴 <리미널>이 시선을 압도합니다. 전시 타이틀과 동명의 작품인 <리미널>은 전시 공간의 센서가 포착한 주변 환경과 인공 신경 조직 데이터를 바탕으로 결정됩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 형상은 주변의 데이터를 학습하고 기억을 쌓아갑니다. 전시장에는 황금색 마스크를 쓴 사람의 언어 <이디엄>이 인간의 발성과 신경망을 통해 실시간으로 생성됩니다. <리미널>은 ‘생각지도 못한 무언가가 출현할 수 있는 과도기적 상태’를 의미하죠. 피에르 위그는 이 전시에서 전반적으로 작품마다 인간과 비인간적 존재를 등장시켜 경계를 흐리고 교차시키며 ‘리미널’에 대해 말하고 있어요. 영상 속에 얼굴도 뇌도 없는 이 기이하고 으스스한 인간의 형상은 ‘공간’이기도 하고 ‘빈 공간’이기도 합니다. ‘공간’이기도 하고 ‘빈 공간’이기도 하다니 이게 무슨 말일까요? 앞에서 언급했지만 리미널 상태는 경계적 상태입니다. ‘무언가가 두 가지의 상태, 두 개의 장소, 혹은 정체성 사이의 경계, 생각지도 못한 무언가가 출현할 수 있는 과도기적 상태‘. 이 상태는 고정된 정체성에서 벗어나 있는 해체와 생성 사이에 있는 상태죠. ’공간‘이기도 하고 ’빈 공간‘이기도 한 저 기이하고 으스스한 얼굴없는 인간은 경계적 존재이면서 리미널한 통로이고 전달자입니다.
이 얼굴 없는 형상은 외부의 자극을 통해 실시간으로 정보를 받고 이를 통해 미묘한 몸짓을 만들어냅니다. 그 몸짓은 곧 ‘언어’가 됩니다. 이 언어는 비인간 존재에게 읽히고, 이는 다시 인간의 행동을 유발하고 반응하도록 합니다. 이러한 것들은 전시 공간을 벗어나서도 이어지고 비인간 존재와 인간은 계속 상호작용하며 인간의 영역을 초월하여 환경이 구성됩니다.
피에르 위그는 이렇게 리미널한 존재나 공간을 창조하여 관객이 그 안에서 감각하고 상상하며 의미를 탐색해 나가도록 유도합니다. 그의 작품 속에 있는 존재들은 모두 고정된 정체성에서 벗어나 ‘경계적 상태’에 있어요. 이런 모호한 상태는 조금 불편하고 혼란스러운 감정과 감각을 동반하는데요. 반면 이 불편함은 새롭고 창조적인 것이 생성되기 직전의 상태이기도 합니다. <이디엄>과 <리미널>은 둘 다 공간과 기술, 인공 지능의 상호작용으로 생물 같은 환경을 구성합니다. 관객인 우리는 그 안에서 ‘능동성’과 ‘수동성’을 동반한 ‘보는 자’, ‘보는 자’는 반응하고 환경을 구성하는 요소로 존재합니다.
<휴먼 마스크(Human Mask)>, 2014. 영상, 컬러, 사운드, 19분
<휴먼 마스크>는 후쿠시마 주변 핵 배제 구역을 배경으로 한 영상입니다. 실제로 버려진 레스토랑에서 훈련된 원숭이에게 인간의 가면을 씌우고 촬영한 것이라고 합니다. 웨이트리스의 복장을 착용한 원숭이는 영상 속에서 기계적으로 돌아다니다가 멈추기를 반복합니다. 때로 원숭이는 멈추어 멍하니 앉아 어딘가를 공허하게 응시합니다. 인간의 가면을 쓴 원숭이가 돌아다니며 우리에게 보여주는 레스토랑의 구석구석 풍경과 반복적인 동작을 보고 있노라면 고립감과 단절감, 섬뜩하고 공허한 불안감과 공포를 느끼게 됩니다.
이것은 동물인가 인간인가, 가면인가 얼굴인가, 저것은 연출된 것인가 아닌가, 끊임없이 피에르 위그는 실재와 허구, 인간과 비인간 사이의 경계에서 ‘정체성’과 ‘주체성’에 대해 질문하는군뇨. 재앙이 일어난 직후의 후쿠시마라는 장소. 버려진 장소인 레스토랑에서 인간의 가면을 쓴 인간 아닌 존재. 훈련된 원숭이의 공허한 시선과 불가능한 응시. 비인간이 착용하고 있는 ‘인간이라는 가면‘. 도대체 인간이란 무엇일까요?
<이디엄(Idiom)>, 2024-진행중. 인공지능에 의해 실시간으로 생성되는 목소리, 금색 LED 마스크
블랙박스 공간에서는 황금 마스크를 착용한 사람이 앉아 있기도 하고 서 있기도 하고 돌아다니기도 합니다. 어둠 속에서 잘 보이지 않아 조금 놀랄 수도 있고 섬뜩한 느낌을 받을 수도 있어요. 이 황금 마스크에는 바이오 센서가 달려 있다고 해요. 주변 환경에 반응하는 이 센서는 관객의 움직임과도 연동되어 있습니다. <이디엄>은 인공지능이 언어 데이터와 신경망 기반 알고리즘을 통해 새로운 형식의 ‘언어적 이미지’를 실시간으로 생성하는 작품입니다. 이 작업은 인간의 언어와 비인간의 세계, 인공 지능과 생명체 사이의 커뮤니케이션 가능성을 탐색합니다. 인간이 지각할 수 없는 부분을 포함한 특정 정보가 인간의 발성기관을 통해 특정한 구문과 음소로 변환되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마스크를 착용한 실체를 알 수 없는 존재가 마스크를 통해 말하면서 ‘공동체’가 형성됩니다. 이때 이 언어는 흔히 쓰이는 말로 표현되는 언어와는 다소 다른 언어인데요. 이런 낯선 언어는 말로 표현하기 어렵고, 말로 표현되지 않는 언어예요. 언어가 달라지면 우리는 마치 다른 나라에 있는 것처럼 그 그룹에 참여하기 어려워집니다. 해독이 어려운 낯선 언어는 다른 방식의 커뮤니케이션과 언어를 요구합니다. 또한 말로 표현되지 않는 낯선 것들을 마주하게 되면 우리는 기존의 방식과는 다른 방식으로 그것들을 해석하려고 애를 쓰게 됩니다. 피에르 위그가 우리에게 전하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경계에서의 감각’. ‘언어’란 무엇일까요? 우리는 인간이 아닌 존재의 언어를 이해할 수 있을까요? 우리 인간의 감각은 얼마나 한정적인 것인가요?
여기서 말하는 '이디엄(idiom)'은 단순한 관용구 이상의 의미를 지니며, 인간이 사고를 구성하고 세계를 이해하는 언어적 형식 그 자체를 탐구하는 단어입니다.
<그라운드 갤러리>
<캄브리아기 대폭발 16>, 2018. 수조, 투구게, 화살게, 아네모네, 모래, 바위
‘캄브리아기 대폭발‘은 캄브리아기(약 5억 4천만 년 전)에 일어난 진화적 사건으로 다양한 종류의 동물 화석이 짧은 기간 안에 갑자기 출현한 것을 말합니다. 이 기간 동안 절지동물, 연체동물, 극피동물 등 대부분의 생물 문(phylum)이 등장했어요. 그 이전에 존재하던 생물들은 단세포 생물 위주의 단순한 형태였는데 캄브리아기 대폭발 이후 이 시기부터 다세포 동물이 다양해지고 감각기관이나 입, 항문, 외골격, 신경계 등이 처음 출현했답니다. 그야말로 이 시기는 가장 급진적으로 생명이 출현한 실험기, 대혼란기, 창조의 시기인 거죠. 그런 의미에서 <캄브리아기 대폭발 16>은 피에르 위그의 이번 전시 주제인 <리미널>과 매우 닮아있어요. 이 작품은 물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사실 바위가 잠겨 있는 공간은 물이 아닙니다. 작가는 바위를 일부러 중력에 문제가 있는 것처럼 보이도록 제작했어요. 표현 방식도 리미널스럽지요? 검은 모래 위에는 캄브리아기 대폭발 당시에 출현한 고대 종이 살고 있습니다. 이 종은 원시 상태 이후 형태가 변하지 않은 살아있는 화석이나 다름없습니다. 이들의 본능적인 행동은 개체의 수명이 다할 때까지 지속되며 번식을 이어가면서 반복됩니다.
상상해 보세요!
<주기적 딜레마(엘디아 델 로호)(Circadian Dilemma (El Dia del Ojo))>, 2017.
수족관, 장님 동굴 테트라(Astyanaxmexicanus, 눈이 있는 것과 없는 것),
조류, 동굴을 스캔하여 떠낸 시멘트 주물, 검은 변색 유리, 위치 기반 프로그램
이 수족관 내부의 풍경은 멕시코 수중 동굴을 리모델링한 것입니다. 여기에는 다양한 종의 테트라 물고기가 살고 있어요. 이 테트라는 수백만 년 전 어두운 동굴에 들어오면서 시각이 퇴화되어 앞을 보지 못해요. 그래서 장님 동굴 물고기(blind cave fish)라고도 불립니다. 작품 제목인 <주기적 딜레마(엘디아 델 로호)(Circadian Dilemma (El Dia del Ojo))>는 동물, 식물, 곰팡이, 박테리아에서 관찰되는 하루 주기 리듬(circadian rhythm)을 의미합니다. 수족관 안에는 장님 테트라와 시력을 가진 테트라가 공존하고 있는데요. 환경의 변화로 시력이 퇴화된 장님 동굴 물고기의 하루 주기 리듬은 지구의 자전인 24시간 보다 빠르다고 합니다. 이 수족관 안에 있는 두 물고기의 하루 주기 리듬은 서로 다른거죠. 수족관 안에는 두 가지의 하루 주기 리듬이 동시에 존재하는 거예요. 수조의 검은색 변색 유리는 빛의 양, 날씨 관련 데이터를 받는 알고리즘 등에 의해 색이 변합니다. 또는 유리 안에 있는 액정으로 인해 유리가 투명해질 수도, 불투명해질 수도, 심지어는 검은색이 될 수도 있답니다.
<주기적 딜레마>는 인간 중심의 시간 인식과 비인간의 감각 세계를 탐구하는 작품입니다.
<카마타(Camata)>, 2024 진행 중
기계 학습으로 구동되는 로보틱스, 자기생성 영상, 실시간 인공지능 편집, 사운드, 센서
사막 한가운데 해골이 놓여 있고 기계가 해골을 탐사합니다. 그런데 이 기계, 마치 인간 같지 않나요? 저 장소는 아타카마 사막이에요. 시멘트를 부어 놓은 것 같은 산이 보입니다. 먼 산을 배경으로 황량한 사막에 놓여 있는 이 해골은 누구인지, 언제 어떤 이유로 죽었는지 그저 골격만 남아있습니다. 뼈대만 남은 해골을 들여다보며 로봇은 무엇을 하고 있는 걸까요?
인간은 생명을 잃었고, 생명이 없는 인간의 유해를 탐사하고 있는 로봇은 인간과 닮아있습니다. 그런데 뼈대만 남은 해골의 형상과 로봇의 형상이 왠지 오버랩 되는군요. 아타카마 사막은 칠레 북부에 위치한 세계에서 가장 건조한 사막 중 하나로 독특한 자연환경과 극한 기후조건을 가진, 천문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입니다. 연평균 강수량이 1mm 이하인 지역도 있고, 어떤 지역은 수백 년간 비가 내리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곳도 있다고 합니다. 당연히 이곳에서는 동식물이 살아갈 수 없겠죠. 정말 극한 생물들만이 존재할 거예요. <카마타>는 일반적인 비디오 촬영 영상 작품이 아니라 AI가 실시간으로 장면을 선택하고 편집하는 자율적 시스템입니다. 금색 구 안의 센서는 지속적으로 출력되는 이미지를 수정합니다. 작품이 이미 완성되어 고정된 형태가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영상인 거죠. 따라서 <카마타>는 실시간으로 관객마다 다른 것을 보게 됩니다.
영상 속 풍경은 실제로 존재하는 장소죠. 생명체가 살지 않는 화성과 환경이 비슷한 장소이기도 하고요. 그런데 화성은 아니잖아요? 미래를 그린 공상 영화에서 본 듯한 이 장소는 왠지 익숙해요. 피에르 위그가 선택한 아타카마 지역은 고도 2400mm 이상의 오염 없는 맑은 하늘을 볼 수 있는 곳으로 천문학의 중심지입니다. 또한 광물 자원이 풍부하고 고대 안데스 문명의 유적과 미라들이 발견되는 다양한 과학 실험지이며 문학, 예술, 철학의 소재가 되기도 하는 희소한 가치를 지닌 지역입니다.
이렇게 <카마타>는 아타카마 지역을 배경으로 기술과 생명, 현실과 허구의 경계, 존재의 리미널 한 상태를 표현한 작품입니다. 이 비디오 영상은 이탈리아 베니스의 푼타 델라 도가나(Punta della Dogana)에서 최초로 공개되었고, 아시아 전시로는 처음으로 현재 서울 리움미술관 <리미널> 전시에서 공개하고 있습니다.
이외에도 <오프스프링(Offspring)>, <U움벨트-안리(UUmwelt-Annlee)>, <암세포 변환기(Cancer Variator)>, <마음의 눈(S)(Mind’s Eye(S))>이 전시되고 있습니다.
피에르 위그 <리미널> 전시는 도슨트 프로그램이 없습니다. 전시장 입구에 리플렛이 비치되어 있습니다.
* 리플렛은 재활용되므로 반납해주셔야 합니다.
바로 근처에 함께 즐기기 좋은 갤러리들이 모여 있습니다.
• 페이스 갤러리 (서울 용산구 이태원로 267)
- 홈페이지 : https://www.pacegallery.com/
- 홈페이지 : https://galleryjoeun.com
• 아마도 예술공간 (서울 용산구 이태원로54길 8)
- 홈페이지 : http://www.amadoart.org/
[주소]
서울 용산구 이태원로55길 60-16
리움미술관 블랙박스, 그라운드갤러리(M3)
[관람시간]
10:00 ~ 18:00 (입장 마감 17:30)
• 휴관일: 매주 월요일
[입장료]
단독 전시 16,000원 / 통합 관람권 20,000원
에디터 탁선